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7세 (문단 편집) === 초기 === 초기에는 혈통으로 정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치세 내내 반란시도에 시달려야 했다. 구체적으로 요크가의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링컨 백작 존 드라폴(de la Pole)[* 리처드 3세의 외조카.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서포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아들이다.], 워릭 백작 에드워드[* 리처드 3세의 친조카. 리처드 3세의 둘째 형 [[조지 플랜태저넷|클러렌스 공작 조지]]의 아들이다.]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링컨 백작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에게 잠재적인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즉위 후에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파인 요크 지지자들을 누그려뜨리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또한 [[에드워드 5세]]를 죽여서 민심을 잃은 [[리처드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감금했다. 결혼하고 다음 해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적장자 [[아서 튜더|아서]]가 태어나자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 요크 가문의 공주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긴 했지만 헨리 7세는 이후에도 10여년간 리처드 3세의 잔당들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들은 런던탑에 갇힌 워릭 백작을 가짜라 주장하고 램버트 심넬이라는 10살 소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왕으로 선언한다. 이후 리처드 3세의 누이인 부르고뉴 공작부인 마르그리트(요크의 마거릿)[*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세번째 아내. 남편의 전사 이후 의붓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도와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때문에 의붓딸인 마리와는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참고로 마리 드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의 첫번째 아내.]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아일랜드에서 6천명의 병력을 구하고 2천명의 독일용병을 잉글랜드에 상륙시키기까지 했다. 헨리 7세는 이 반란을 막기 위해 직접 런던탑에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인증]](?)까지 여러번 하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어쨌든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지친 상태에 워릭 백작의 정체도 의심스러워서 반란에 대한 호응이 적었고, 요크셔 부근 스토크에서 가볍게 격파하며 수괴(?) 램버트 심넬까지 사로 잡았다. 심넬은 가짜 워릭 백작임을 인증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궁전의 부엌데기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심넬은 거의 환갑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자식도 남겼다.]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존의 동생 [[서포크]] 공작 에드먼드는 헨리 8세 시절까지 살아남지만, 헨리 8세 시절 반란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존과 에드먼드의 동생 리처드는 대륙으로 도망.] 이후에도 계속 또 다른 반역 시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리처드 3세에게 형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 공작 리처드가 살아있다며 플랑드르 출신 퍼킨 워백이라는 야심가를 내세웠다. 이 사람이 죽은 요크 공작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반란의 규모는 이전보다 더 컸다. 이번에는 앞서 가짜 워릭 백작을 지원한 부르고뉴 공작부인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가 시끄러울수록 매우 즐거워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와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지원까지 같이 받아냈기 때문. 가짜 요크 공작의 무리는 세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모두 격퇴당했다. 하지만 가짜 요크공은 도주하여 아일랜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로까지 도망쳐서 제임스 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호시탐탐 헨리 7세의 왕위를 탐냈다.[* 가짜 요크 공은 무슨 신통력이 있었는지 아일랜드 족장들에게 환심을 샀고, 제임스 4세와도 친해져서 정체가 가짜인줄 알았어도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심지어 제임스 4세는 헨리 7세와의 합의에 따라 가짜 요크공에게 잠시 지원을 끊게 되자 자신의 배를 내주어 그를 유럽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고 한다.] 1497년에는 콘월 지방에서 가혹한 징세에 항의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왕실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반란군이 런던을 향해 진격했으나 오합지졸이라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가짜 요크공 워백은 이를 기회로 여겨 3~4000명의 병력을 콘월에 상륙시키고 스스로를 리처드 4세로 선포하지만, 소식이 늦게 갔는지 '''이미 오합지졸 병력들이 진압당한 지 세 달이 넘어서였다.''' 이번에 워백은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처형당한다. 이 이후로는 소소한 음모들은 있었어도 직접적인 무력 반란은 잦아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헨리는 귀족과 군대를 통솔하며 통치력을 인정받았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진압보다는 관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귀족들에게 환심을 샀다. 덕분에 얼마 못 갈 것 같던 왕위는 점차 탄탄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